활동소식
이른 아침 초등학교 교실. 우유 당번 학생이 교실 문을 열려다 얼어붙는다. 담임선생님이 교실에서 자살한 모습을 목격한 것. 영화 <라자르 선생님>(필리프 팔라도 감독, 2011)의 첫 장면이다.
대안학교 웰다잉 수업에서 학생들이 가장 깊이 몰입해서 본 영화였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죽음을 직면하는 일, 그 의미를 담백하고 순수하게 담아낸 영화라서 아이들이 빠져들었던 것 같다.
해민이의 질문
아이들의 죽음 인식은 대체로 만 6~10세 사이에 구체적으로 생긴다. 아들 해민이가 죽음에 대해 처음 질문한 것은 여섯 살 무렵, 그림책 『다시 살아난 찌르』를 읽고서였다. 매미 찌르는 친구들이 알을 낳으면 죽는다는 걸 알고 슬픔에 잠긴다. 그러나 땅속에서 긴 시간을 견뎌야 할 애벌레들을 보며, 그들의 모습 속에 자신이 다시 산다는 것을 깨닫는다.

심조원·박경진 글 그림, 보리출판사
책을 읽고 나서 해민이의 질문이 이어졌다.
“우리도 알을 낳고 죽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돼?”
“지금 이 몸으로 다시 살 수는 없는 거잖아?”
여섯 살 아이의 질문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명확했다. 특히 마지막 질문은, 이미 알고 있는 답을 엄마에게 확인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들렸다.
나의 답변은 장황했다.
“우리 몸은 땅속에서 없어지지만 마음은 영원히 남는 거야. 다른 아름다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고. 그러니까 해민이가 엄마 아들인 건 영원히 변치 않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려는 의도가 앞선 나머지 너무 많은 말을 한 것이다. 해민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고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아이에게 필요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귀 기울여 들어주는 공감과 인내였다. 그래야 아이의 자존감이 자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이 대화는 아이를 위한 죽음교육 공부를 새롭게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학부모에게 전한 이야기
아이와 죽음을 이야기할 때 대전제는 이렇다. 부모가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아이가 말한 문장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 경청하는 태도야말로 어른에게 필요한 첫 번째 조건이다.
자녀에게 어두운 이야기를 피하고 밝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서천석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는 말한다. 80%에 가까운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조부모, 친척, 또는 키우던 반려동물 등 가까운 존재의 죽음을 경험한다고. 죽음은 생각보다 이르게, 자주 아이 곁에 찾아온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 앞에서 ‘아이와 함께 하는 죽음 이야기’를 강의한 적이 있다. 가족의 죽음을 겪은 아이들이 던질 법한 질문을 소개했다.
"할아버지는 왜 돌아가셨어요?"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돌아가셨어요?"
"형은 내가 못되게 굴어서 죽었어요?"
늙어서 돌아가셨다고 하면 아이가 늙음과 죽음을 같은 것으로 여겨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할 수 있다.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라고 말해 주는 편이 나은 이유다. 또한 ‘죽음=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가까운 가족의 죽음 앞에 두려움과 죄책감을 덜어줄 말이 필요하다. “엄마는 여기서 너와 함께 살고 싶어 하셨어.” “죽음은 벌이 아니란다. 네가 못되게 굴어서가 아니야.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물론 이것은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어린 시절 죽음을 깊이 이해해 본 아이는 훗날 겪게 될 상실 앞에서 버틸 힘을 갖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아들이 다니던 대안초등학교에서 부모교육 강좌를 열었을 때, 나는 30~40대 부모들에게 ‘소원노트’를 나눠주었다. 소원노트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며 죽음을 숙고하도록 안내하는 책자로,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에서 제작한 자료다.
직접 경험한 첫 번째 죽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아이였을 때 가족에게 죽음을 어떻게 전해 들었는지, 나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인지 답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처음 듣는 질문에 답을 적는 것을 머뭇거리는 이도 있고,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이도 있었다. 강좌가 끝난 뒤 여섯 분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소원노트. (사)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제작
스물한 살의 후기
서울의 한 대학에서 웰다잉 특강을 한 날도 기억난다. 수업 말미에 교수님이 질문했다. “죽음을 앞둔 가족이 두려움을 호소할 때, 갑자기 웰다잉 교육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나는 ‘죽음의 순간이 되기 전까지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답했다. 살아온 시간의 기쁨과 슬픔을 새기며 사진 자서전을 만들어보거나, 함께 읽을 그림책을 찾아보라고도 권했다.
며칠 뒤 받은 강의 후기 중 하나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아직 스물한 살이긴 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급성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대학 1학년 때는 가까운 친구가 큰 사고를 당해 지금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 곁에서 죽음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자주 느꼈습니다.’
또 다른 학생은 일주일이 지나도 가장 강하게 남은 말이 ‘우리는 모두 죽기 전까지는 살아 있는 존재’라는 문장이라고 썼다. 아픈 이도 환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여섯 살 아이에게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도, 스물한 살 청년에게도 죽음교육은 필요했다. 그것은 죽음을 앞둔 사람만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모두를 위한 공부였다.
무와 새, 번데기와 나비
지금까지 생명을 보내고 들이는 일에 대해 글을 썼다. 죽음교육은 그 두 가지를 잇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뒤 아들을 품에 들이는 데서 이야기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매일 밤 내가 드리는 기도에는 늘 죽음이 담겨 있다. 나의 죽음 이후 이어질 아들의 삶과, 병고 속에 있는 지인들이 지켜야 할 존엄, 어머니와 나의 죽음 위에 놓이길 바라는 평온에 대해 기도한다. 이런 바람은 역설적으로 내게 생명의 환희를 일깨우며 이를 타인과 나누고 싶은 마음을 심어주었다.
다시 <라자르 선생님>으로 돌아가 본다. 영화의 마지막, 선생님은 학교를 떠나며 자신이 쓴 우화를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알제리 망명자인 그는 방화 테러로 아내와 자녀들을 참혹하게 잃은 과거를 가슴에 담고 있다.
그가 들려준 우화 속 나무는 번데기를 지키려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뜨거운 불꽃이 숲을 집어삼켰고 결국 번데기는 나비가 되지 못했다. 나무의 마음은 까만 숯이 되었지만, 훗날 팔에 날아와 앉은 새에게 번데기와 아름다운 나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를 보던 학생들은 이 대목에서 정지 버튼을 눌러가며 우화를 받아쓰기 시작했다. 그 집중한 얼굴들을 잊을 수 없다.
나 역시 나무와 새, 번데기와 나비의 이야기를 새로 쓰고 들려주는 이가 되고 싶다. 내 팔에 날아와 앉은 작은 새는 이제 엄마 품을 벗어나 날갯짓하는 청년으로 성장했다.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아들을 보며, 나도 많은 이에게 생명의 아픔과 환희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앞서 소개한 소원노트 속 두 가지 질문을 남긴다.
당신이 경험한 첫 번째 죽음은 어떤 것이었나?
그 죽음은 지금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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