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의 죽음 이야기

    ‘삭는 미술’이 보여준 생명의 지혜 2026-02-12 며칠 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찾았을 때, 여느 전시와는 확연히 다른 낯선 광경을 마주했습니다. 전시장 곳곳에는 썩어가는 과일 향이 진동하고, 바닥에는 흙더미가 쌓여 있으며, 벽에 걸린 그림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스스로 갈라지고 부서지고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Sak-da: The Poetics of Decomposition)였습니다. 흔히 미술관은 작품의 부패를 막고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온습도를 정밀하게 조절하는 ‘불후(不朽, 썩을 후)’의 수장고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그 정반대의 질문을 던집니다. “더 잘 보존하기보다 더 잘 분해되는 법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인간은 왜 그토록 썩어 없어지는 자연의 순리를 거부하고 박제된 영원을 꿈꾸는 것일까요?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국립현대미술관), 사진출처: 박인조       영원을 꿈꾸는 보존, 사라짐을 택한 예술 전시장 입구에서 만난 첫 번째 작품, 이은재 작가의 작품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은 쉽게 갈라지고 바래는 유약한 물질인 달걀 노른자를 매개체로 한 템페라 기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고고학자였던 아버지가 유물에 쌓인 흙을 조심스레 털어 내듯, 한 겹 한 겹 물감을 쌓아 올려 그림을 그려나갔습니다. 이 작품에서 시간이 흐르며 화면에 생기는 미세한 균열은 재현의 실패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틈새로 사라져가는 순간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완벽한 보존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변화 속에서 작품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은재, 이제 근대 모서리를 닦아라-서문>(2023), 사진출처: 박인조   이어지는 공간에 아사드 라자(Asad Raza)의 작품 〈흡수〉(Absorption, 2026)는 미술관을 아예 거대한 발효실로 바꿉니다. 지역에서 수집한 낡은 책, 커피 찌꺼기, 심지어 동물의 뼈와 폐기물들을 섞어 비옥한 ‘네오소일(neosoil)’을 만들어냅니다. 작가는 썩어 문드러지는 과정은 소멸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사회적 발효의 시작점이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시 기간 동안 특별히 꾸려진 경작자 팀이 흙을 돌보고 분석하며 관객과 흙에 대한 일을 나눕니다. 원하는 사람들은 필요한 만큼의 흙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20세기 지성사의 거인으로 불리는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는 인간의 문화를 ‘날것(자연)’과 ‘익힌 것(문화)’의 대립과 조화로 분석했습니다. 그는 죽음을 개별 자아의 영원한 소멸이 아니라, 우주라는 거대한 체계 안에서 에너지가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동하는 ‘구조적 교환’으로 보았습니다. 그에게 죽음이란, 문화라는 옷을 입었던 인간이 다시 자연이라는 ‘날것’의 상태로 되돌아가 새로운 생명을 위한 원료가 되는 필연적인 순환 과정입니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레비 스트로스의 통찰을 예술의 언어로 생생하게 구현해냅니다.   삭음의 미학: 발효와 변화가 만드는 생동감 '삭다'라는 우리말에는 ‘썩어 없어진다’는 부정적 의미와 함께, '소화되어 맛이 들다'(발효되다, 酵(발효 효), 醱(삽‧발효 발))라는 질적 고양의 의미가 공존합니다. 이 이중적 의미는 한국인의 발효 문화에서 비롯된 독특한 지혜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삭음'보다는 '안티에이징(Anti-aging)'이라는 이름 아래 늙지 않고 썩지 않는 것에만 집착합니다.자본주의와 기술 만능주의는 부패를 정복해야 할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자연스러운 생명의 순환으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미래학자들이 나노 로봇으로 세포를 수리하며 불멸을 말할 때, 현대 미술가들은 썩어가는 과일에서 빛을 밝히는 에너지를 발견합니다.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의 채널링 하우스>는 누룩과 우뭇가사리 같은 유기물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이 협력하는 ‘사회적 발효'를 제안합니다. 부패가 허용된 공간에서 비로소 새로운 생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영원한 보존이 곧 죽음과 다름없음을 역설합니다. 움직이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은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Rice Brewing Sisters Club), 채널링 하우스>(Channeling House, 2026), 사진출처: 박인조   멕시코 작가 루루 곤살레스 오스나야의 〈눈물의 껍질〉 역시 삭음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작가는 멕시코 장례 문화에서 영혼을 보호하고 부패를 늦추기 위해 사용되는 식초에 절인 양파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양파의 연약한 막을 글리세린과 식초로 코팅하여 보존하려 하지만, 재료는 여전히 매일 산화되고 색상과 무늬가 변합니다. 이는 우리가 아무리 보존하려 해도 결국 모든 것은 삭아간다는 진실을 전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변화의 과정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이 탄생합니다. 발효가 재료를 더 깊은 맛으로 익혀가듯, 삭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라 질적 변화이자 성숙의 과정입니다.   루루 곤살레스 오스나야(Lulu Gonzalez Foscachi), 눈물의 껍질>(2026), 사진출처: 박인조   분해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삶   의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국 모든 생명은 마침표를 찍습니다. 이번 전시를 돌아보며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삭아 허물어진 그 자리에 풀이 자라고 바람이 불 때, 나의 삶은 비로소 전체 생태계의 일부로 영원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의 바니타스(Vanitas)가 해골을 통해 죽음을 경고했다면, '삭는 미술'은 허무한 세상 속에서도 서로를 돌보고 발효시키는 '정(情)'의 지혜를 가르쳐줍니다. 이는 단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생명이 순환하며 서로를 살리는 관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삭아 허물어진 그 자리에 풀이 자라고 바람이 불 때, 나의 삶은 비로소 전체 생태계의 일부로 영원해집니다. 기꺼이 삭아 없어짐으로써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는 원료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썩지 않는 기계의 영생보다, 잘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생명의 순환이 더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불후의 명작이라는 환상을 걷어내면 비로소 ’삭음의 미학‘이 보입니다. 기술로 죽음을 미루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향기롭게 삭혀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발효되어 맛을 내고 또 다른 생명을 키워내는 거름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삶의 마침 길일 것입니다.   ※ 이 글의 집필자인 박인조 작가는 사실모 상담사이며, 사실모 협력기관인 (재)에덴낙원(이사장 곽요셉, https://www.edenparadise.co.kr) 감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닌 완성: 모네와 르누아르가 보여준 존엄한 죽음 2025-12-10 빛을 그린 화가, 어둠을 건넌 삶 최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를 관람하며,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수련 작품을 인상 깊게 보았습니다. 프랑스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된 모네의 말년 걸작 연작은 거대한 캔버스를 가득 채운 물빛과 색채의 향연으로 관람객을 압도합니다. 형태가 흐릿해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연못 위로 반사된 하늘과 나무,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흔적이 고요히 펼쳐집니다. 거대한 수련 연작은 타원형 전시실에서 방문객들을 감싸안습니다. 이 그림이 탄생한 배경에는 깊은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상흔 속에서 모네는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아 이 작품들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습니다. 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을 위한 평화의 기념비가 된 이 연작은, 죽음과 파괴의 시대에 화가가 남긴 희망의 메시지였습니다. 클로드 모네, (1917-1920), 사진출처: 박인조   그러나 모네의 인생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병으로 잃었으며, 첫째 아들 장(Jean Monet)을 일찍 떠나보내야 했고, 세계대전 중에는 둘째 아들 미셸(Michel Monet)이 전장에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노년에는 백내장으로 색채가 왜곡되어 보이는 고통까지 겪었습니다. 평생 빛을 쫓던 화가에게 시력의 상실은 존재 자체의 위협이었습니다. 클로드 모네, (1922),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럼에도 모네는 죽음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하며 자신의 유한성을 직시할 때 비로소 진정한 실존이 가능하다고 말했듯, 모네는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지베르니 정원의 수련 연못 앞에서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두려움 대신 자신이 평생 그려온 빛과 색채 속에서 담담한 평온을 찾았습니다.   고통 속에서 피워낸 행복 인상파를 대표하는 또 다른 화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의 작품세계에는 햇살 가득한 정원, 웃음 짓는 사람들, 춤추는 연인들이 넘쳐납니다.  르누아르, (1876),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러나 이 밝은 그림 이면에는 모네 못지않은 깊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는 50대 무렵부터 심각한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고통받았습니다. 손가락이 변형되고 어깨가 굳어 혼자서는 붓조차 들 수 없었습니다. 말년에는 휠체어에 앉아 마비된 손가락에 붕대로 붓을 묶어 그림을 그렸습니다. 전쟁터에 나간 두 아들을 걱정하고, 1915년 아내 알린(Aline Charigot)의 죽음을 겪으면서도 그는 행복을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친구 마티스가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까지 왜 계속 그림을 그리느냐?”라고 묻자, 르누아르는 미소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 법이지” 르누아르, (1892),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는 1919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마지막 작품을 완성한 후,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이제야 무언가를 배우기 시작한 것 같은데.” 이 말은 그의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겸손함을 보여줍니다. 인상파의 두 거장의 삶과 작품 속에서 죽음을 고난으로부터의 해방과 삶의 완성으로 바라보는 깊은 통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존엄한 죽음을 향한 예술적 실천 두 화가의 삶은 현대 의료가 추구하는 호스피스 완화의료의 철학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말기 환자나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가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심리적·사회적·영적 고통을 함께 나누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도록 돕습니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대신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완결로 받아들이며 품위 있는 임종을 강조합니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삶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예술을 통해 이러한 존엄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평생 사랑한 일을 하며 삶의 의미를 완성해갔습니다. 모네는 빛의 흔적을 캔버스에 담으며, 르누아르는 행복의 순간들을 그려내며 각자의 방식으로 임종을 준비했습니다. (1926), 출처: Wikimedia Commons (1910년경), 출처: Wikimedia Commons   쇼펜하우어는 죽음을 “삶의 고통을 끝내는 해방”으로 여겼습니다. 그의 염세주의 철학에서 죽음은 의지의 굴레로부터의 최종적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모네와 르누아르는 더 나아갑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단순한 고통의 종식이 아니라, 삶 전체를 완성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창조함으로써, 그들은 죽음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삶의 진정한 완성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남은 해방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는 르누아르의 말은 단순한 위안이 아닙니다. 이것은 죽음을 대하는 하나의 철학이자 태도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흔히 모든 것의 끝, 의미의 상실, 존재의 소멸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두 화가의 삶은 다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죽음은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동시에 우리가 살아온 삶의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죽음을 터부시하고 회피합니다. 병원의 차가운 복도에서, 기계음과 함께 맞이하는 임종은 죽음을 더욱 비인간적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호스피스 완화의료가 추구하는 것처럼, 그리고 모네와 르누아르가 보여준 것처럼, 우리는 죽음을 다르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사랑한 것을 끝까지 붙잡고, 의미 있는 일을 계속하며, 삶을 능동적으로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인상파의 두 거장이 남긴 유산은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고난의 종말과 영원한 아름다움에 대한 증언이며, 죽음을 존엄하게 맞이하는 방법에 대한 깊은 통찰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완성입니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그것을 예술로 증명했습니다. 그들이 마지막 붓질을 하며 남긴 평온한 미소는, 죽음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 <죽음과 삶>(1908-1915년) / 안토니 곰리, < Ground >(2025) 2025-10-10   삶과 죽음, 그리고 동행의 의미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 (Death and Life, 1908-1915)을 보면, 죽음이 삶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깊은 진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림에서 죽음은 해골의 형상으로 우리 바로 곁에 서 있지만, 그림 속 인물들은 평화로운 문양 속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꿈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한 여인만이 다릅니다. 그녀는 죽음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합니다. 놀랍게도 그녀의 표정에는 두려움 대신 평온함이 흐릅니다. 죽음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히 응시하는 얼굴입니다. 그녀에게 죽음은 '끝'이 아닌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여집니다. 클림트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전합니다. 인생을 통해 죽음을 배워간다면, 죽음은 삶을 방해하는 파괴자만 아니라,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동반자도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욱 소중하고, 죽음을 인정할 때 삶이 더욱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호스피스에서 자원봉사하시는 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두려움만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여전히 뜨겁고 생생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소망을 경험한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평온한 얼굴을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삶을 온전히 껴안으면서 동시에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합니다. 이는 ‘두려움’을 지나 ‘수용’에 이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평안한 표정입니다. 최근 뮤지엄 산(Museum SAN)에서 만난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의 전시는 이러한 경험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해주었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안토니 곰리는 인체와 공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조각, 설치 및 공공미술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이 작품은 마치 무덤처럼 조용한 지하 돔 공간에 철제 블록으로 만든 인체 조각들을 배치한 설치작품입니다. 플라워 가든에서 시작하여 지하의 반구형 구조물을 지나 야외 정원으로 이어지는 동선에 설치된 조각 7점은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돔 중앙의 오큘러스를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 바깥에서 스며드는 바람과 흙냄새, 멀리 보이는 풍경, 그리고 깊은 침묵이 어우러져 침묵 가운데 생각하게 만듭니다. 철제 블록 옆에 앉거나 누워 죽음을 체험하는 듯한 순간을 맞이해보면, 주변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삶과 죽음, 존재와 소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 조용히 마음속에 스며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하는 문서’를 작성하는 분들은 결국 자신의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돕는 상담사 선생님들은 그 길을 동행해 주는 소중한 동반자입니다. 때로는 서로 머뭇거려지고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이 길의 끝에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명료함과 존엄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더욱 빛나는 삶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인간이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할 수 있도록 돕는 동행, 여러분은 죽음 앞에서도 평온할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아가는 동행자입니다. 클림트 그림 속 여인처럼 죽음을 담담히 응시할 수 있도록 돕는 여정의 안내자입니다. 안토니 곰리, (The Angel of the North, 1998), 출처: Wikimedia Commons(ⓒMike Peel)   안토니 곰리, (2025), 사진출처: 박인조   2025년 제10호(2월)부터 새로운 기획기사 ‘명화 속 죽음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번 기획기사의 집필자인 박인조 작가는 사실모 상담사이며, 사실모 협력기관인 (재)에덴낙원(이사장 곽요셉, https://www.edenparadise.co.kr) 감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페르디난드 호들러, <병상에 누운 발렌틴 고데-다렐>(1914) / 마르크 샤갈, <결혼>(1944년) 등 2025-08-10 페르디난드 호들러, (1914)  출처: Wikimedia Commons   스위스 화가 페르디난드 호들러(Ferdinand Hodler)는 아내 발렌틴 고데-다렐(Valentine Godé-Darel)이 암으로 투병하는 2년간 그녀의 모습을 200여 점의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중 하나인 을 보면, 어떤 이들은 이런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호들러는 마치 일기를 쓰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내가 점점 쇠약해져가는 과정을 담담히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 과정은 호들러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과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감,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시간에서 애도의 감정을 켜켜이 쌓아가며 예술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사실 호들러에게 죽음은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을 병으로 잃고 홀로 세상에 남았던 그에게, 그림은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서는 의미였습니다. 그림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가 알프스산맥의 아름다운 모습과 제네바 호수를 담은 풍경화를 자주 그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호들러는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죽음 외에도 이 세상에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술입니다. 제가 평생에 걸쳐 표현한 게 바로 그것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1914) 이처럼 상실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또 다른 화가가 있습니다. 현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이 열리고 있는데, 러시아 태생의 화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샤갈은 사랑하는 아내 벨라 로젠펠트(Bella Rosenfeld)를 이국땅 미국에서 감염병으로 잃었습니다. 이 그림 은 1944년 벨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슬픔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는 애도의 마음과 함께 결혼이라는 가장 사랑으로 충만한 순간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슬픔의 표현에만 그치지 않고, 벨라와의 아름다운 삶의 기억을 되살려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슬픔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호들러와 샤갈과 같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상실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켜 영원한 기억과 사랑의 증거로 남겼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사랑의 기억은 슬픔을 넘어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을 이들의 작품을 통해 깨닫습니다.      마르크 샤갈, (1944년)  출처: Wikimedia Commons(ⓒ Sharon Mollerus)   페르디난드 호들러, 자연의 리듬을 따라 흐르는 풍경>(1908년) 출처: Wikimedia Commons 마르크 샤갈, 생일>(1915년) 출처: Wikimedia Commons    2025년 제10호(2월)부터 새로운 기획기사 ‘명화 속 죽음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번 기획기사의 집필자인 박인조 작가는 사실모 상담사이며, 사실모 협력기관인 (재)에덴낙원(이사장 곽요셉, https://www.edenparadise.co.kr) 감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찰스 앨런 길버트의 <모든 것이 헛되다> / 폴 세잔의 <해골이 있는 정물화> 2025-07-03 찰스 앨런 길버트의 (All Is Vanity, 1902)는 바니타스(vanitas)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예술의 걸작입니다. 한 여성이 화장대 앞에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멀리서 보면 이 장면 전체가 해골로 보입니다. 작품의 제목 'vanity'는 화장대와 허영심의 이중적 의미를 담아냅니다. 1902년 라이프 잡지에 실리며 소비주의와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폴 세잔의 (Still Life with Skull, 1895-1900) 역시 주목할 만한 바니타스 작품입니다. 정교한 붓 터치로 그려진 해골과 과일의 배치는 생명의 일시성과 죽음의 필연성을 암시합니다. 17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유행한 바니타스 정물화는 라틴어로 '헛됨'을 의미합니다. 이 그림들은 당시 식민지 무역으로 얻은 부와 풍요로움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죽음의 필연성을 상기시키는 상징물을 배치했습니다. ‘시간의 유한함’(모래시계), ‘생명의 덧없음’(비누 거품, 꺼져가는 촛불), ‘세속적 부와 권력의 무의미’(금은보화, 왕관), ‘지식의 한계’(책, 지구의), ‘삶의 즐거움 이면의 허무’(악기, 그림, 트럼프), ‘죽음의 불가피성’(해골, 투구, 창)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호스피스 전문가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대표 저서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에서 부제목, “죽어가는 사람이 의사, 간호사, 성직자 그리고 가족에게 가르쳐 주는 것들”에 주목하게 됩니다. 죽음에 대응하는 원리로 “우리가 죽어가는 환자들로부터 배운 것들”을 꼽습니다. 임종을 앞둔 환자들과의 대화로 쓴 이 책은 죽음의 실재성과 함께 희망이 공존하는 생의 마지막 단계를 보여줍니다. 죽음을 성찰하는 시간은 삶의 진정한 목표에 초점을 맞추게 하고, 소중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 좀 더 진실한 삶을 추구하며, 생명을 대하는 자세나 사람들과의 관계, 오늘이라는 시간을 소중하게 살아야 함을 알려줍니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지만, 동시에 예상치 못한 문제들도 야기합니다. 인공지능과 첨단 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지식과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존재합니다. 바니타스 예술이 보여주듯, 삶의 유한함을 인식하는 것은 오히려 현재의 삶을 더 소중히 여기고 진정한 가치에 집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박인조 작가>   ※ 이 글의 집필자인 박인조 작가는 사실모 상담사이며, 사실모 협력기관인 (재)에덴낙원(이사장 곽요셉, https://www.edenparadise.co.kr) 감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죽음의 고통>(Agonie) 2025-07-03 험상궂은 남성이 공격적으로 맞은편 사람에게 다가가고, 상대방은 얼굴을 돌리며 몸을 빼고 가슴 앞으로 손을 모아 방어합니다. 불규칙하게 조각난 인물과 배경은 서로 뒤섞여 혼란스러운 상황을 표현합니다. 누구나 두려워하고 밀쳐내고 싶은 죽음과의 싸움을 추상적으로 나타냅니다. 죽음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두려움’과 ‘고통’입니다. ‘질병’, ‘소멸’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이 연상되고, ‘외로움’과 ‘단절’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불편해하고 멀리하고 싶어 합니다. 이 그림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Agonie)은 뒤틀린 인물의 왜곡된 신체, 독특한 구조의 배경, 선명한 색채를 통해 죽음의 공포와 이를 피하려는 인물의 긴장감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시장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작품은 이라는 제목의 에곤 실레가 그린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의 포스터입니다. 긴 탁자 주변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데, 실레는 자신을 탁자의 제일 윗자리에 배치했고 그의 맞은편은 비어 있습니다. 이 자리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스승 클림트의 자리였습니다. 클림트의 빈 자리로 그를 추모했습니다. 29살의 나이 차이에도 서로를 지지했던 두 예술가의 관계에서 죽음은 두려움과 슬픔을 넘어, 사랑과 존경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에곤 실레의 작품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죽음을 그린 화가들, 순간 속 영원을 담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 이 글의 집필자인 박인조 작가는 사실모 상담사이며, 사실모 협력기관인 (재)에덴낙원(이사장 곽요셉, https://www.edenparadise.co.kr) 감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 프랑수와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기다림> / <첫걸음마> 2025-07-03 이 그림은 공동번역 성경 를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토비트는 평생 진리와 정의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로 눈이 멀게 됩니다. 아내 안나가 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중, 20년 전에 메대에 사는 가바엘에게 맡겨 둔 돈이 생각나 아들 토비아를 보내 찾아오게 합니다. 토비아가 먼 길을 떠나며 작별 인사를 하자, 안나는 돈은 더 해서 뭐하겠느냐며 이 아이는 늘 함께 있으면서 지팡이 구실을 했다면서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런데 예정된 귀가 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고, 아들이 혹시 죽은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애통한 마음으로 날마다 아들이 떠난 길을 지켜봅니다. 마침내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본 안나가 앞서 뛰어가고, 토비트는 허둥거리며 대문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Millet)는 자신을 20여 년간 애타게 기다리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 로 잘 알려진 밀레는 가난한 농부의 집에 8남매 중 장손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했습니다. 20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지만, 할머니와 어머니는 화가의 꿈을 응원하며 그를 도시로 보냅니다. 그리고 중년이 되었을 때 밀레는 할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게 되고, 2년 후에는 아들을 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지만, 그 이듬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하지만 집에 갈 여비를 마련하지 못해 두 번의 장례식에 다 가지 못합니다. 이후 살롱전에 수상하여 받은 상금과 몇몇 작품을 팔아 고향집에 머물며 할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깊은 슬픔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그림, (1861년)을 그렸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그리움, 그리고 고마움입니다. 밀레, (1858)   ※ 이 글의 집필자인 박인조 작가는 사실모 상담사이며, 사실모 협력기관인 (재)에덴낙원(이사장 곽요셉, https://www.edenparadise.co.kr) 감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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