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의 죽음 이야기

    찰스 앨런 길버트의 <모든 것이 헛되다> / 폴 세잔의 <해골이 있는 정물화>
    2025-07-03 12: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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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세잔의 해골.jpg

    찰스 앨런 길버트의 <모든 것이 헛되다>(All Is Vanity, 1902)는 바니타스(vanitas)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예술의 걸작입니다. 한 여성이 화장대 앞에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멀리서 보면 이 장면 전체가 해골로 보입니다. 작품의 제목 'vanity'는 화장대와 허영심의 이중적 의미를 담아냅니다. 1902년 라이프 잡지에 실리며 소비주의와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폴 세잔의 <해골이 있는 정물화>(Still Life with Skull, 1895-1900) 역시 주목할 만한 바니타스 작품입니다. 정교한 붓 터치로 그려진 해골과 과일의 배치는 생명의 일시성과 죽음의 필연성을 암시합니다.
    17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유행한 바니타스 정물화는 라틴어로 '헛됨'을 의미합니다. 이 그림들은 당시 식민지 무역으로 얻은 부와 풍요로움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죽음의 필연성을 상기시키는 상징물을 배치했습니다. ‘시간의 유한함’(모래시계), ‘생명의 덧없음’(비누 거품, 꺼져가는 촛불), ‘세속적 부와 권력의 무의미’(금은보화, 왕관), ‘지식의 한계’(책, 지구의), ‘삶의 즐거움 이면의 허무’(악기, 그림, 트럼프), ‘죽음의 불가피성’(해골, 투구, 창)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호스피스 전문가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대표 저서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에서 부제목, “죽어가는 사람이 의사, 간호사, 성직자 그리고 가족에게 가르쳐 주는 것들”에 주목하게 됩니다. 죽음에 대응하는 원리로 “우리가 죽어가는 환자들로부터 배운 것들”을 꼽습니다. 임종을 앞둔 환자들과의 대화로 쓴 이 책은 죽음의 실재성과 함께 희망이 공존하는 생의 마지막 단계를 보여줍니다. 죽음을 성찰하는 시간은 삶의 진정한 목표에 초점을 맞추게 하고, 소중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 좀 더 진실한 삶을 추구하며, 생명을 대하는 자세나 사람들과의 관계, 오늘이라는 시간을 소중하게 살아야 함을 알려줍니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지만, 동시에 예상치 못한 문제들도 야기합니다. 인공지능과 첨단 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지식과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존재합니다.

    바니타스 예술이 보여주듯, 삶의 유한함을 인식하는 것은 오히려 현재의 삶을 더 소중히 여기고 진정한 가치에 집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박인조 작가>

     

    ※ 이 글의 집필자인 박인조 작가는 사실모 상담사이며, 사실모 협력기관인 (재)에덴낙원(https://www.edenparadise.co.kr) 감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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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프 클림트 <죽음과 삶>(1908-1915년) / 안토니 곰리, < Ground >(2025) 2025-10-10   삶과 죽음, 그리고 동행의 의미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 (Death and Life, 1908-1915)을 보면, 죽음이 삶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깊은 진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림에서 죽음은 해골의 형상으로 우리 바로 곁에 서 있지만, 그림 속 인물들은 평화로운 문양 속에서 고요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꿈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한 여인만이 다릅니다. 그녀는 죽음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합니다. 놀랍게도 그녀의 표정에는 두려움 대신 평온함이 흐릅니다. 죽음을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히 응시하는 얼굴입니다. 그녀에게 죽음은 '끝'이 아닌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여집니다. 클림트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깨달음을 전합니다. 인생을 통해 죽음을 배워간다면, 죽음은 삶을 방해하는 파괴자만 아니라,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동반자도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욱 소중하고, 죽음을 인정할 때 삶이 더욱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호스피스에서 자원봉사하시는 분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이들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두려움만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여전히 뜨겁고 생생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소망을 경험한다고 했습니다.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평온한 얼굴을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들은 삶을 온전히 껴안으면서 동시에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합니다. 이는 ‘두려움’을 지나 ‘수용’에 이른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평안한 표정입니다. 최근 뮤지엄 산(Museum SAN)에서 만난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의 전시는 이러한 경험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해주었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안토니 곰리는 인체와 공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조각, 설치 및 공공미술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이 작품은 마치 무덤처럼 조용한 지하 돔 공간에 철제 블록으로 만든 인체 조각들을 배치한 설치작품입니다. 플라워 가든에서 시작하여 지하의 반구형 구조물을 지나 야외 정원으로 이어지는 동선에 설치된 조각 7점은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돔 중앙의 오큘러스를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 바깥에서 스며드는 바람과 흙냄새, 멀리 보이는 풍경, 그리고 깊은 침묵이 어우러져 침묵 가운데 생각하게 만듭니다. 철제 블록 옆에 앉거나 누워 죽음을 체험하는 듯한 순간을 맞이해보면, 주변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삶과 죽음, 존재와 소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 조용히 마음속에 스며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하는 문서’를 작성하는 분들은 결국 자신의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돕는 상담사 선생님들은 그 길을 동행해 주는 소중한 동반자입니다. 때로는 서로 머뭇거려지고 망설여지기도 하지만, 이 길의 끝에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명료함과 존엄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더욱 빛나는 삶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인간이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할 수 있도록 돕는 동행, 여러분은 죽음 앞에서도 평온할 수 있는 길을 함께 찾아가는 동행자입니다. 클림트 그림 속 여인처럼 죽음을 담담히 응시할 수 있도록 돕는 여정의 안내자입니다. 안토니 곰리, (The Angel of the North, 1998), 출처: Wikimedia Commons(ⓒMike Peel)   안토니 곰리, (2025), 사진출처: 박인조             페르디난드 호들러, <병상에 누운 발렌틴 고데-다렐>(1914) / 마르크 샤갈, <결혼>(1944년) 등 2025-08-10 페르디난드 호들러, (1914)  출처: Wikimedia Commons   스위스 화가 페르디난드 호들러(Ferdinand Hodler)는 아내 발렌틴 고데-다렐(Valentine Godé-Darel)이 암으로 투병하는 2년간 그녀의 모습을 200여 점의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중 하나인 을 보면, 어떤 이들은 이런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호들러는 마치 일기를 쓰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내가 점점 쇠약해져가는 과정을 담담히 화폭에 담았습니다. 이 과정은 호들러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과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감,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직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시간에서 애도의 감정을 켜켜이 쌓아가며 예술적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사실 호들러에게 죽음은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을 병으로 잃고 홀로 세상에 남았던 그에게, 그림은 단순한 생계 수단을 넘어서는 의미였습니다. 그림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가 알프스산맥의 아름다운 모습과 제네바 호수를 담은 풍경화를 자주 그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호들러는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죽음 외에도 이 세상에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술입니다. 제가 평생에 걸쳐 표현한 게 바로 그것이었다는 사실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1914) 이처럼 상실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또 다른 화가가 있습니다. 현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이 열리고 있는데, 러시아 태생의 화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샤갈은 사랑하는 아내 벨라 로젠펠트(Bella Rosenfeld)를 이국땅 미국에서 감염병으로 잃었습니다. 이 그림 은 1944년 벨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슬픔 속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는 애도의 마음과 함께 결혼이라는 가장 사랑으로 충만한 순간을 작품에 담았습니다. 슬픔의 표현에만 그치지 않고, 벨라와의 아름다운 삶의 기억을 되살려낸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슬픔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호들러와 샤갈과 같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상실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켜 영원한 기억과 사랑의 증거로 남겼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사랑의 기억은 슬픔을 넘어 새로운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을 이들의 작품을 통해 깨닫습니다.      마르크 샤갈, (1944년)  출처: Wikimedia Commons(ⓒ Sharon Mollerus)   페르디난드 호들러, 자연의 리듬을 따라 흐르는 풍경>(1908년) 출처: Wikimedia Commons 마르크 샤갈, 생일>(1915년) 출처: Wikimedia Commons    2025년 제10호(2월)부터 새로운 기획기사 ‘명화 속 죽음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번 기획기사의 집필자인 박인조 작가는 사실모 상담사이며, 사실모 협력기관인 (재)에덴낙원(https://www.edenparadise.co.kr) 감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찰스 앨런 길버트의 <모든 것이 헛되다> / 폴 세잔의 <해골이 있는 정물화> 2025-07-03 찰스 앨런 길버트의 (All Is Vanity, 1902)는 바니타스(vanitas)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예술의 걸작입니다. 한 여성이 화장대 앞에서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멀리서 보면 이 장면 전체가 해골로 보입니다. 작품의 제목 'vanity'는 화장대와 허영심의 이중적 의미를 담아냅니다. 1902년 라이프 잡지에 실리며 소비주의와 외모 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폴 세잔의 (Still Life with Skull, 1895-1900) 역시 주목할 만한 바니타스 작품입니다. 정교한 붓 터치로 그려진 해골과 과일의 배치는 생명의 일시성과 죽음의 필연성을 암시합니다. 17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유행한 바니타스 정물화는 라틴어로 '헛됨'을 의미합니다. 이 그림들은 당시 식민지 무역으로 얻은 부와 풍요로움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죽음의 필연성을 상기시키는 상징물을 배치했습니다. ‘시간의 유한함’(모래시계), ‘생명의 덧없음’(비누 거품, 꺼져가는 촛불), ‘세속적 부와 권력의 무의미’(금은보화, 왕관), ‘지식의 한계’(책, 지구의), ‘삶의 즐거움 이면의 허무’(악기, 그림, 트럼프), ‘죽음의 불가피성’(해골, 투구, 창)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호스피스 전문가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대표 저서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에서 부제목, “죽어가는 사람이 의사, 간호사, 성직자 그리고 가족에게 가르쳐 주는 것들”에 주목하게 됩니다. 죽음에 대응하는 원리로 “우리가 죽어가는 환자들로부터 배운 것들”을 꼽습니다. 임종을 앞둔 환자들과의 대화로 쓴 이 책은 죽음의 실재성과 함께 희망이 공존하는 생의 마지막 단계를 보여줍니다. 죽음을 성찰하는 시간은 삶의 진정한 목표에 초점을 맞추게 하고, 소중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 좀 더 진실한 삶을 추구하며, 생명을 대하는 자세나 사람들과의 관계, 오늘이라는 시간을 소중하게 살아야 함을 알려줍니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인간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지만, 동시에 예상치 못한 문제들도 야기합니다. 인공지능과 첨단 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지식과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존재합니다. 바니타스 예술이 보여주듯, 삶의 유한함을 인식하는 것은 오히려 현재의 삶을 더 소중히 여기고 진정한 가치에 집중하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박인조 작가>   ※ 이 글의 집필자인 박인조 작가는 사실모 상담사이며, 사실모 협력기관인 (재)에덴낙원(https://www.edenparadise.co.kr) 감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죽음의 고통>(Agonie) 2025-07-03 험상궂은 남성이 공격적으로 맞은편 사람에게 다가가고, 상대방은 얼굴을 돌리며 몸을 빼고 가슴 앞으로 손을 모아 방어합니다. 불규칙하게 조각난 인물과 배경은 서로 뒤섞여 혼란스러운 상황을 표현합니다. 누구나 두려워하고 밀쳐내고 싶은 죽음과의 싸움을 추상적으로 나타냅니다. 죽음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두려움’과 ‘고통’입니다. ‘질병’, ‘소멸’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이 연상되고, ‘외로움’과 ‘단절’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불편해하고 멀리하고 싶어 합니다. 이 그림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Agonie)은 뒤틀린 인물의 왜곡된 신체, 독특한 구조의 배경, 선명한 색채를 통해 죽음의 공포와 이를 피하려는 인물의 긴장감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 구스타프 클림트부터 에곤 실레까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시장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는 작품은 이라는 제목의 에곤 실레가 그린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의 포스터입니다. 긴 탁자 주변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데, 실레는 자신을 탁자의 제일 윗자리에 배치했고 그의 맞은편은 비어 있습니다. 이 자리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스승 클림트의 자리였습니다. 클림트의 빈 자리로 그를 추모했습니다. 29살의 나이 차이에도 서로를 지지했던 두 예술가의 관계에서 죽음은 두려움과 슬픔을 넘어, 사랑과 존경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에곤 실레의 작품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죽음을 그린 화가들, 순간 속 영원을 담다』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 이 글의 집필자인 박인조 작가는 사실모 상담사이며, 사실모 협력기관인 (재)에덴낙원(https://www.edenparadise.co.kr) 감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 프랑수와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기다림> / <첫걸음마> 2025-07-03 이 그림은 공동번역 성경 를 배경으로 합니다. 주인공 토비트는 평생 진리와 정의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로 눈이 멀게 됩니다. 아내 안나가 품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중, 20년 전에 메대에 사는 가바엘에게 맡겨 둔 돈이 생각나 아들 토비아를 보내 찾아오게 합니다. 토비아가 먼 길을 떠나며 작별 인사를 하자, 안나는 돈은 더 해서 뭐하겠느냐며 이 아이는 늘 함께 있으면서 지팡이 구실을 했다면서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런데 예정된 귀가 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고, 아들이 혹시 죽은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애통한 마음으로 날마다 아들이 떠난 길을 지켜봅니다. 마침내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본 안나가 앞서 뛰어가고, 토비트는 허둥거리며 대문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Millet)는 자신을 20여 년간 애타게 기다리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 로 잘 알려진 밀레는 가난한 농부의 집에 8남매 중 장손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했습니다. 20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지만, 할머니와 어머니는 화가의 꿈을 응원하며 그를 도시로 보냅니다. 그리고 중년이 되었을 때 밀레는 할머니의 임종 소식을 듣게 되고, 2년 후에는 아들을 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았지만, 그 이듬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하지만 집에 갈 여비를 마련하지 못해 두 번의 장례식에 다 가지 못합니다. 이후 살롱전에 수상하여 받은 상금과 몇몇 작품을 팔아 고향집에 머물며 할머니와 어머니에 대한 깊은 슬픔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그림, (1861년)을 그렸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그리움, 그리고 고마움입니다. 밀레, (1858)   ※ 이 글의 집필자인 박인조 작가는 사실모 상담사이며, 사실모 협력기관인 (재)에덴낙원(https://www.edenparadise.co.kr) 감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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