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소식
좋은 죽음’ 위한 돌봄전략 필요…두려움·고통 덜고 집에서 가족과
[황보연의 초고령사회의 질문들]
⑳생을 어떻게 마감할 것인가
황보연기자
‘9988234’라는 말이 있다. 아흔아홉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틀 앓고 사흘째 죽는다는 의미다. 실제로 임종에 이르는 과정은 이렇게 간단하지 않다.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요양원에서 거동이 불편한 채로 지내다 쓸쓸히 떠나기도 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19살 이상 성인 1021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좋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요소로 ‘신체적 고통을 겪지 않는 것’과 ‘가족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우선시됐다. 환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해온 의료진 4명과의 개별 인터뷰를 바탕으로 좋은 죽음을 위해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짚어봤다. ※도움말=김대균(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교수·권역별호스피스센터장) 박중철(연세암병원 완화의료센터 교수) 유신혜(서울대병원 완화의료임상윤리센터 교수) 허대석(서울대 의대 명예교수·혈액종양내과)
① 안락사와 조력자살, 존엄사가 뭔가요?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에서 말기암 환자 상연이 스위스로 간 것은 ‘의사조력자살’(Physician-Assisted Suicide)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의사가 약물을 처방하면 환자가 복용해 죽음에 이르는 것이다. 국내에선 불법이고 스위스에선 외국인에게도 문이 열려 있다. ‘안락사’(Euthanasia)는 스위스에서도 불법이다. 의사가 환자에게 직접 약물을 투여해 죽음을 유도하는 행위다. 네덜란드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일부 국가에서만 허용된다.
연명의료가 생명 연장을 위한 것인 반면 의사조력자살과 안락사는 생명 단축과 닿아 있다. 이에 비해 연명의료 중단은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지 않지만 고의로 단축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그렇다면 존엄사는 뭘까. 미국 오리건주의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에서 건너온 말이다. 이 법은 조력자살을 포함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존엄사라는 용어는 매우 포괄적으로 쓰이다 보니 혼동을 주는 경우가 많다.
지난달 성누가병원 김수정(내과전문의) 연구팀은 존엄사라는 모호한 표현이 안락사와 의사조력자살, 연명의료 중단 등에 관한 여론을 왜곡시킨다는 분석 결과를 내놨다. 지난해 6월 성인 1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구체적인 설명 없이 용어만 알려줬을 때는 의사조력자살에 72.1%가 동의했는데 자세한 절차를 알려주니 동의율이 47.0%로 급감했다. 국민 다수는 존엄사를 연명의료 중단과 같은 의미로 인식한다. 그러다보니 조력존엄사법 등의 용어가 의사조력자살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높은 것처럼 착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가장 선호하는 의사결정은 연명의료 중단이었다.
② 연명의료 중단 결정, 얼마나 이행되고 있나?
법적 근거가 없던 시절, 연명의료 중단 문제는 뜨거운 논란을 불러왔다. 2009년 ‘김 할머니 사건’에서 인간 존엄을 위해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강요해선 안 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뒤에야 관련 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2018년 본격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이 그 결실이었다.
현행법은 치료를 하더라도 회생 가능성이 없고 사망이 임박한 임종기 환자에 대해 연명의료 중단 또는 유보 결정을 허용한다. 연명의료는 심폐소생술과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을 말한다.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김 할머니는 연명의료 중단이었고, 같은 해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은 일체의 생명 연장 조처를 거부해 연명의료가 유보된 경우였다.
연명의료 중단까지 의사결정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다. 우선 만 19살 이상 성인이라면 누구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향서)를 쓸 수 있다. 2019년 이후 올해 10월 말까지 312만5283명이 동참했다. 미리 작성한 의향서가 있더라도 넘어야 할 관문이 있다. 환자가 의사능력이 없을 경우, 담당 의사와 또 한명의 해당 분야 전문의가 함께 서류를 확인한다.
아직까지 의향서가 연명의료 중단으로 이어진 경우는 많지 않다. 같은 기간 연명의료가 중단된 46만3093명 중 의향서 작성자는 5만1990명(약 11%)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의료진이 임종이 임박한 상황에서 환자와 상의해 연명의료계획서를 작성하거나 가족 진술에 따라 환자 의사를 추정하는 경우다. 환자가 본인 의사를 밝힐 수 없는 상태인 경우, 가족 2명 이상이 평소 환자 생각을 전할 수 있다. 이마저도 알 수 없다면 환자 가족 전원(2촌 이내 직계 존비속)이 합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의료진과 환자 가족 사이에 크고 작은 의견 대립이 생긴다. 경기 파주시의 김아무개(87) 어르신은 최근 뇌병변 장애를 앓아온 50대 아들에 대한 혈압상승제 투여 여부를 두고 의료진과 마찰을 빚었다. 김 어르신은 아들이 의향서를 썼으니 연명치료를 중단해달라고 했지만 의료진 판단은 달랐다. 급격히 신체 기능이 떨어지긴 했지만 환자가 임종 과정에 있다고 판단하지 않은 것이다. 암 환자가 아니라면 사망 시점에 대한 예측이 쉽지 않다.
③ 환자와 가족 부담 더는 의사결정인데, 왜 꺼리는걸까?
연명의료 중단 결정이 제도화된 것은 생애말기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의료자원 배분 측면에서도 긍정적이다. 급성기 환자 치료에 더 집중할 여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연구원이 2023년 약 35만명의 사망자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사망 30일 전에 연명의료를 중단한 환자의 마지막 한달 의료비는 평균 460만원 정도(건강보험 급여항목 기준)인 데 견줘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은 일반 사망자는 약 910만원이었다. 문제는 연명의료계획을 수립한 경험이 없는 일반 사망자가 전체의 82.6%에 이른다는 점이다.
제도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의료진의 임상적 판단 시점이 너무 늦다. 통상 수개월 이내 사망할 것으로 보이는 말기 환자 판정을 받으면 연명의료계획서를 쓸 수 있다. 그러나 계획이 이행되려면 임종기에만 가능하다. 짧게는 사망 하루이틀 전, 길어야 2~3주 전에야 결정이 내려진다. 실제로 연명의료 중단 이행 사망자의 약 73%가 임종 한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결정을 내린다. 결정이 늦어질수록 직전까지 고가의 의료 행위가 집중된다. 이 때문에 말기 환자로 대상 범위를 확대하자는 주장이 나온다.
현행 제도 아래에서도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 미리 계획을 짜고 대비하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의학 드라마에서 기적같이 환자를 살려내는 천재 의사에 익숙한 사회에서 연명의료 중단은 종종 ‘의료의 실패’로 각인된다. 연명의료 중단을 사망 선고로 받아들이는 환자라도 만나면 의료진은 더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가장 큰 장벽은 가족들의 반대다. 임종 과정에서 가족주의가 강하게 발현된다. 본인이 의향서를 썼더라도 가족의 반대로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이어가는 경우가 적잖이 나온다. 의료진과 함께 결정을 내렸다가 가족이 취소하는 경우도 있다. 평소 죽음에 대한 소통이 없다가 임종이 임박한 순간에 매우 짧게 이뤄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서 가족에게 자신의 죽음이나 생애말기 상황, 치료 계획 등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는 비중이 전체의 54.3%에 달했다.
2012년 10월5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뉴욕주 맨해셋의 한 병원과 한인 가족 사이에 벌어진 논란에 대해 상세히 보도했다.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다 쓰러진 20대 여성은 뇌종양 진단을 받은 뒤 상태가 급격히 악화됐다. 의식이 명료한 여성은 의료진에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청했으나 부모가 강하게 반대했다. 급기야 환자 본인 결정을 존중한다는 법원 판단까지 나왔지만 가족들은 교인들과 함께 조직적인 반대 운동을 이어갔다. 결국 딸은 부모의 뜻을 수용했고 집에서 두세달 연명의료를 받다가 사망했다. 당시 미국 언론은 ‘딸의 죽음에 대한 권리’에, 미주 한국 언론은 ‘그녀를 살리고 싶은 가족의 바람’에 초점을 맞췄다.
④ 생애말기 돌봄부터 임종케어까지, 무엇이 필요한가?
많은 이들이 바라는 ‘좋은 죽음’은 질환으로 인한 고통과 두려움을 덜고 익숙한 장소에서 가족과 함께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집에서 임종을 맞기란 쉽지 않은 일이 됐다.
2023년 장기요양등급 인정을 받은 노인의 사망 장소를 보면, 의료기관과 시설에서 숨진 비중이 각각 72.9%와 12.4%였고 자택은 14.7%에 그쳤다. 만성질환자들이 제대로 된 의료·돌봄을 받지 못하다가 사망 한달 전부터 의료기관에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다 임종하는 경우가 많다. 연명의료 중단으로 퇴원을 하더라도 돌봄받을 곳이 마땅치 않으면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회전문 현상도 나타난다.
말기 환자들은 통증과 구토, 복수 등 신체적 어려움은 물론이고 당황스럽고 슬픈 감정을 넘어 우울증을 겪기도 한다. 가족에 대해서는 미안함과 섭섭함이 동시에 찾아든다. 정부는 연명의료결정법 도입과 함께 호스피스 제공 기관을 기존 입원형에서 가정형, 자문형 등으로 늘려왔다. 의료진과 사회복지사, 임상심리사 등 다학제 팀이 꾸려져 말기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심리적 안정을 돕는다. 다만 아직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 2023년 기준 전체 암 사망자 중 호스피스를 이용한 비중은 26.2%에 그친다. 게다가 암 환자들이 호스피스에 머무르는 기간(24.2일, 2024년 입원형 기준)은 한달이 채 안 된다. 암 외에 다른 말기 환자도 적절한 완화의료와 돌봄을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가정형 호스피스와 재택의료, 요양시설 의료서비스 등이 함께 활성화돼야 한다.
‘죽음의 질’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영국은 ‘사전돌봄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적극 지원한다. 환자와 가족, 친구, 의료진 등이 함께 생애말기 돌봄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환자가 바라는 치료 방식과 선호하는 환경 등을 문서로 남기고 관리한다. ‘죽음을 금기시하는 문화를 바꾸자’는 인식 개선에 나선 것도 주목할 만하다.
기사원문보러가기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295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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