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각각 폐암 4기와 인지 저하 증상을 지닌 노부부에 대한 출장상담 요청이 있었습니다. 방문 날짜를 잡기 위해 따님과 통화를 했을 때, 불과 나흘 전에 아버님께서 임종하셨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경황이 없으실 텐데 상담 날짜는 미뤄도 괜찮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자 따님은 어머니의 등록을 위해 방문해달라고 하셨고 다음날인 5월 1일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마포구 염리동의 골목을 따라 좁은 언덕길을 올라서자 오래된 주택가가 나왔습니다. 현관으로 들어서니 따님이 반갑게 맞아주셨고 연로하신 어머님은 지팡이를 짚고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며칠 전 상을 치렀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평온한 분위기였습니다.
78세인 모친은 심근경색과 뇌경색으로 인한 편마비와 함께 인지기능이 다소 저하된 상태였습니다. 제 설명 중 어려운 부분은 따님이 다시 쉽게 풀어 어머니께 설명해주셔서 등록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 따님도 스스로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필요성을 느끼고 함께 등록을 하셨습니다.
이후 따님으로부터 아버님의 투병과정에 대해 들었습니다.
86세의 아버님은 1년 4개월 전, 폐암 4기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체력이 너무도 약한 아버님께 항암치료를 할 것인가를 두고 가족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따님은 6년 전 시아버님도 똑같이 폐암 4기 진단을 받고 병원치료를 받으셨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치료가 의미 없을 정도로 환자는 힘들어하셨고, ‘나 숨 한 번 시원하게 쉬는 게 소원이야.’라는 시아버님의 간절한 말씀에 제주 편백나무 숲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아직 어렸던 자녀를 유모차에 태우고는 시아버님과 함께 하루종일 숲에 있다가 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병원 치료과정은 연로하신 시아버님께 너무나 큰 고통이었습니다. 따님은 시아버지의 투병과 임종 과정에 관한 생각을 말하며 가족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결국 아버님은 병원치료를 않고 댁에서 지내시도록 가족 모두 합의하였습니다.
이후 1년 3개월 동안 아버님은 항암치료 없이 댁에서 평소와 똑같이 생활하셨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 기간 동안 아버님이 숨이 차다거나 답답한 증상, 또는 통증을 호소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녀들이 계속 ‘아버지, 숨이 갑갑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어도 고개를 저으셨을 뿐,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야 비로소 숨이 갑갑하다는 말씀을 하신 게 다였습니다. 아버님은 열흘간 누워계시다 집에서 편안히 임종하셨습니다. 임종 이틀 전, 집으로 왕진온 의사가 딱 한 번 진통제를 놓아드렸을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폐암 말기의 고통스러운 증상 없이 집에서 임종하신 아버님의 희귀사례를 들으며, 가족의 사랑과 보살핌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전해주시는 따님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습니다. 아버님께 병원치료를 하지 않은 것이 최선이었는지 한편으로 죄책감이 든다고 하는 따님께 저는 두 가지를 힘주어 말했습니다.
“지금 죄책감을 느끼는 그 마음 이해합니다. 우리가 고인께 아무리 최선을 다했어도 누구든 죄책감은 피해갈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고속도로처럼 뻗어있는 병원치료의 길에서 다른 선택을 위해 갓길로 접어들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합니다. 아버님을 위해 진정 용기 있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누워계시던 마지막 10일 동안 자녀들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호스피스를 알아보았습니다. 사실모의 출장상담에 대해서도 몇 군데 연락을 거친 뒤에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가정 방문하여 등록을 해주는 제도에 감사를 표하시기에 사실모의 역사를 간략히 언급했습니다.
오후 햇살이 들어오는 작은 거실은 정갈했고 마치 잘 그려진 일본만화의 풍경처럼 아늑하여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현관을 나서는데 저의 신발이 신기 좋게 돌려 놓아져 있었습니다. 따님은 사양하는 제게 간식 몇 가지를 가방에 챙겨 넣어주시고 문밖 계단 어귀까지 배웅해주셨습니다.
언덕의 계단을 한참 내려온 후 혹시나 하고 뒤돌아보니 따님이 그때까지 한자리에 서 계셨습니다. 그가 전하는 인사에 저도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습니다. 잠시라도 애도 시간을 함께한 사람을 배웅하는 인사는, 고인께 드리는 인사이기도 하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의 모습이 제 마음속에 남아 부족한 솜씨나마 그림으로 그려보았습니다.
미국의 외과의이자 공중보건 정책 전문가인 아툴 가완디는 그의 저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질병, 노화, 죽음에 따르는 여러 가지 시련은 의학적인 관심사로 다뤄져 왔다. 인간의 욕구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 기술적인 전문성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우리 운명을 맡기는, 일종의 사회공학적 실험이었다. 그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누군가는 실패로 끝난 실험에 들기를 거부하고 생애 말의 정직한 희망을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그들의 용기가 새로운 길을 열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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