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암 말기, 어머니의 생명 찬가
고(故) 박지수 씨(1964년생)는 올해 6월 세상을 떠나기 전, 호스피스에서 시집(제목: ‘토닥토닥 들려주는 수의壽衣 이야기’) 한 권을 남겼다.
아들 임현민 씨(36세)에게 물었다.
“어머니의 시 중에 어떤 것이 가장 마음에 와닿아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떡국에 대한 시하고요, ‘빈대떡’이란 시도 좋아요.”
많은 시 중 유독 음식과 관련된 내용이 마음에 남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엄마가 평소에 뭘 좋아했는지 볼 수 있어서 좋아요. 떡국은 제가 해드린 거라서 기억나고요. 엄마가 음식 만드는 걸 좋아하셨고, 맛있게 잘 드셨기 때문에 항상 생각이 많이 났어요.”
어머니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생명은, 음식을 매개로 지속되는 것 같았다.

고(故) 박지수 님
수차례 시한부 진단을 받다
박지수 씨의 시집 마지막 페이지에는 4월 5일 날짜가 적혀있다. 임종 두 달 전이었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삶과 죽음을 사유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전한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신림역 인근 조용한 카페에서 큰아들 임현민 씨를 인터뷰하기로 했다. 조금 일찍 가서 기다리니 곧 그가 도착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와 헬멧을 벗은 청년의 얼굴은 핼쑥했다. 인사를 나눈 후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저는 엄마 큰아들 임현민이고요. 일반 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커피를 시키고 나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부모님은 10여 년 전에 이혼하셨어요. 어머니는 2020년경 위암 4기 진단을 받으셨는데, 의사 선생님이 따로 저를 불러 얘기했어요. 수술 못 할 수도 있다고요. 개복했다가 다시 닫을 수 있다고도 했어요. 상태가 너무 나빴기 때문에 길어야 여명 3개월로 본다는 거예요. 그때는 굉장히 충격이 컸는데, 다행히 수술이 잘 됐어요. 2, 3년간 그런대로 괜찮게 지내셨거든요.”
이후에도 CT와 엑스레이 결과를 보면서 의사로부터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몇 차례 들었다. 3개월, 6개월, 3개월.... 이런 식으로 거듭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럼에도 박지수 씨는 그 시간을 의연히 살아냈다. 계속 추적 관찰하던 어느 날, 혈뇨 증상이 생겨 응급실을 찾았다. 검사 결과 요관에 암이 전이 돼서 소변줄을 막고 있다고 했다. 항암 대신 현상 유지를 위해 요관에 스텐트를 넣는 시술을 했다. 2024년 말에는 종양으로 인해 담관 쪽도 좁아지면서 황달기가 생겼다. 담즙이 안 나오면 간이 망가진다고 했다. 이번에도 스텐트를 넣는 시술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배액관(호스)을 끼워 담즙을 빼내는 시술을 했다.
큰 후회는 남지 않아
임현민 씨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면서 조심스러웠다. 사별 후 채 반년이 안 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현민 씨에게 인터뷰에 응하기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다. “딱히 그렇진 않았어요. 투병 생활이 길고 제가 모시던 기간도 길었거든요. 지금도 엄마 핸드폰을 제 명의로 바꿔서 들고 다녀요. 간혹 사진을 보곤 하는데 그때 생각이 많이 나요. 아쉬운 부분도 있고 좋았던 것도 생각나고요. 그래도 큰 후회는 남지 않는 게, 저는 엄마 의견을 전적으로 따랐거든요. 제 고집을 피우지 않았어요. 엄마가 항암치료 하기 싫다고 하시면 알겠다고 하고 따랐어요. 내 고집대로 해서 나중에 엄마한테 안 좋을까 봐 그랬던 것 같아요.”
병원에서 권유하는 항암치료를 일단 시도했지만 중단하곤 했다. 계속 구토하며 식사를 못하는 등 부작용이 크자 박지수 씨는 말했다. “이렇게 사는 것보다 그냥 사람답게 살다 가는 게 낫겠다.” 이후 현민 씨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여행지에 모시고 다니거나,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만들어 드렸다. 나중에 황달이 올 때는 현민 씨도 깊이 고민했다. 함께 의논하여 ‘한 번 더 해보자’ 하고는 약을 바꿔 치료를 진행했다. 머리가 빠져 가발을 착용하는 수순이 이어졌고 다시 치료를 중단했다. 결정이 쉽지 않았지만, 어떻게 해도 후회가 남는다면 어머니 뜻이 중요했다.
“호스피스에 계실 때도 엄마가 뭔가 먹고 싶다고 하면 집에서 만들어 갔어요. 엄마가 요리를 잘하시기 때문에 입맛이 까다로워요. 유튜브 채널을 보고 만들어서 가져가면 잘 드셨어요. 때에 따라 고기나 장어, 곱창까지 오만가지 다 가져다드렸죠.”
현민 씨는 그 시간이 힘들기도 했지만, 그 덕에 후회 없이 어머니를 보내드렸다고 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호스피스
임현민 씨의 외할머니는 젊은 시절 암으로 돌아가셨다. 이모와 삼촌도 암으로 사망 또는 투병하는 등 가족력이 이어졌다. 현민 씨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 제안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당시 간염 보균자라 몸이 약했던 어머니는 말했다. “내가 언제 갈지 모르니 찍어놓자.” 가족 모두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스스럼없이 얘기 나누곤 했다. 배액관 시술 때는 박지수 씨 본인이 청하여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의향서 작성 후, 항암 대신 가정형 호스피스의 도움을 받으며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러나 계속 열이 나고 산발적으로 급박한 상황이 닥쳐왔다. 집에서 처치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서 응급실행이 이어졌다. “한 달에 한 다섯 번 이상 갔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입원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는 자유롭게 다닐 수 없다는 이유로 입원을 싫어했죠. 하지만 상황이 심각해지자 마음을 바꾸셨어요.”
현민 씨는 가장 좋은 호스피스를 찾기 위해 심사숙고했고, 서울의 한 호스피스가 안성맞춤으로 보여 입원을 결정했다. “후회는 없지만 사진을 보면 ‘좀 더 곁에 있을걸.’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호스피스 시설이 좋아도 혼자 휠체어를 타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긴 어렵거든요. 한정된 공간에서 5, 6개월 있는 게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어요. 그래서 속상한 거죠.”
호스피스는 입원 기간에 제한이 있다. 기한을 넘긴 박지수 씨는 한 차례 퇴원했다가 일주일 후 재입원했다. 가톨릭 신자인 그에게 호스피스 성직자의 기도와 좋은 말씀은 많은 위로를 주었다. 건물 내 성당과 기도실도 도움이 되었다.
현민 씨에게 호스피스의 장단점에 대해 물었다. “전체적인 시스템은 무척 좋았어요. 환경이 깨끗했고 프로그램도 다양했고요. 의료진이나 요양사분들도 친절했지만, 다소 아쉬움도 남아요. 개인적 차이 탓에 좀 불친절한 분도 있었거든요. 사람이 하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을지 몰라도 좀 더 사명감 있는 분들이 그 공간에 있으면 좋겠어요. 진짜 마지막을 준비하는 곳이고 환자 마음이 편해야 하니까요. 섬망 증상이 있거나 때로 과격해지는 환자도 있어요. 이를 겪어낼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이 있는 분이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대부분 잘해주셨지만, 그런 점이 좀 아쉬웠어요.”

잊을 수 없는 시간
호스피스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언제였을까? 어머니와 함께 한 작은 음악회가 아닌지 물었다. 현민 씨는 음악회도 기억에 남지만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어느 날 밤, 그가 혼자 병상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일을 마친 동생이 들렀다. 원래 간병인 한 명만 있을 수 있는 시간대였다. 병원 직원들은 현민 씨 형제를 잘 알고 있어서 양해해주었다. 어머니는 거의 의식이 없어지기 직전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현민 씨는 그때 어머니와 동생이 서로 껴안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달라고 청했다. 젊은 시절 모델 활동을 할 만큼 아름다웠던 어머니는, 가혹할 정도로 여윈 모습이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그가 아들을 가만히 감싸 안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를 안은 건장한 아들의 뒷모습에도 뜨거운 감정이 실렸다. 현민 씨는 자신의 운명에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에게는 세상 누구보다 아름다운 어머니와 동생이었다. “영원히 기억에 남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사진을 찍었어요. 병원에 갈 때마다, 산책할 때나 내가 가져간 음식을 엄마가 드실 때도 동영상을 찍어 두었어요. 그 순간을 앞으로는 못 볼 테니까.”
현민 씨 가족은 본래 무척 화목했다. 부모님은 경제적 의견 차가 있어 이혼했지만, 아버지도 지금까지 두 아들에게 사랑을 주는 다정한 분이다. 어머니가 의식이 없어진 후 현민 씨는 아버지께 연락했다. 아버지는 ‘그래, 한번 가볼게.’ 하고는 병원을 찾아왔다. 투병 중인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병석의 어머니를 본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현민 씨는 그 모습을 잊지 못한다. 한 달간 병원에 머문 아버지는 어머니의 임종까지 함께 했다.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말했다. “많이 미안하다. 너희가 고생이 많았다.”
어머니의 유산
박지수 씨는 항상 큰 수첩에 글을 썼다. 이를 본 호스피스 봉사자의 제안으로 시집이 나오게 되었다. 모든 시가 좋았지만 ‘간병인 선생님’이라는 제목에 시선이 갔다. 병동에서 제일 기저귀를 잘 가는 사람, 10년간 남편 병간호하고 사별 후에는 남을 돕는 사람, 주변을 밝고 환하게 만드는 그 사람에게 지수 씨는 시의 마지막 연으로 화답했다. ‘그대에게 작위를 내리노니/ 아름다운 기저귀 여왕이로다’ 시집은 멋 부리지 않은 소박한 언어로 타인과 세상의 아픔까지 녹여냈다. 한마디로 영민함과 유머가 넘치는 여성이었다.
현민 씨는 어머니의 묵주 반지를 끼고 다닌다.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한 후 그의 애장품이 되었다. 또 하나 간직한 것은 어머니의 메시지가 담긴 캘리그라피다. 2016년, 가족과 함께 예술의 전당에 갔을 때였다. 어머니가 글귀를 정해서 써달라고 한 후 받아왔다고 했다. ‘온 세상이 현민이 현준이 편이다’. 현민 씨는 항상 이 캘리그라피를 냉장고에 붙여놓았다. 어머니는 자잘한 당부를 쓰는 대신 온 세상이 두 아들 편이라고 선포했다. 나도 부모지만 감히 넘볼 수 없는 스케일이었다.
현민 씨는 일상 속 어머니의 가르침을 기억한다. “내 기분 좋을 때는 누구나 잘한다. 기분이 나쁠 때도 잘해줘라.” 어머니의 이런 말을 새긴 덕에 현민 씨는 ‘함께 있으면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곤 한다. 어머니는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 지혜를 배운 현민 씨는 말한다. “안 좋은 걸 봤을 때는 남을 욕하기보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좋은 걸 봤을 때는 ‘나는 저렇게 해야지.’, 이렇게 새기며 살고 있어요.”
최근 현민 씨는 연이어 가족의 임종을 겪었다. 어머니가 6월에 돌아가신 후 친할머니는 10월에, 고모가 11월에 돌아가셨다. “가까운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떠나다 보니, 되도록 옆에 있는 사람한테 잘하고 볼 수 있을 때 보자는 생각을 해요. 최대한 즐겁게 살자고 다짐도 하고요. 언제 갈지 모르니 일 또한 내가 잘하고 즐거운 걸 하자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나를 보고 있을 엄마에게 더욱 성공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엄마 생전에 더 많이, 더 좋은 것을 해드리고 싶었어요. 한다고 했지만 내 마음에 안 차다 보니, 더 열심히 살아서 잘 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버틸 수 있는 힘
현민 씨에게 지금 버틸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이번에도 생각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가정 교육인 것 같아요. 얼마 전에도 아빠하고 밥 먹으면서 얘기 나눈 적이 있어요. 내가 이렇게 잘 클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의 좋은 가정 교육과 사랑 때문이었다고요. 보고 듣고 배운 게 좋은 것들이라 제가 좋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고요. 근데 그게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아, 그래도 잘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 가지를 꼽는다기보다 전체적으로 부모님의 가정 교육과 사랑, 이런 것 때문에 지금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고 생각해요.” 극적인 하나의 사건이나 징표가 아닌, 함께 했던 느린 시간의 힘이 지금을 견디게 한다.... 이것이 그가 한 말의 요지였다.
젊은 현자와 같은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애도를 겪는 분들과 나누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게 사람마다 워낙 다르니까 정형화할 수 없지만 멀리, 그러니까 멀리 떠나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좀 나을까요? 항상 가슴 속에 있으니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 나중에 또 만나게 될 거라고.... 고인이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까 잘 살아내야 된다는 마음가짐으로 지내면 좋겠어요. 물론 슬프고 힘들 때는 쏟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억지로 누르고 있으면 안 되니까요. 사람마다 슬픔이 찾아오는 시기가 다를 것 같아요. 당장 그 순간에 슬픈 사람이 있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 빈자리를 느꼈을 때 오는 힘듦, 슬픔이 있을 거예요. 그럴 때는 그냥 온전히 받아들이는 방법밖엔 없는 것 같아요. 애써 외면하려 하지 말고 감정을 직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게 최선의 방법이겠지요. 저 역시 그렇게 하고 있고요.”
현민 씨는 어머니가 의식이 없을 때도 계속 이야기를 들려드렸다. 기도하고 왔다는 얘기, 잘 잤냐는 인사, 사랑한다는 얘기 등 깨어있을 때와 다름없이 귀에 대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할까 말까 할 때는 하는 게 좋다’라는 생각을 굳히는 계기가 된 일이다. 어머니 임종 전날, 아버지가 병상을 지키고 현민 씨는 동생 집에 가서 자기로 했다. 그는 병실을 나가려다 다시 들어와서 말했다. “엄마, 사랑해. 갔다가 올게.” 이 말과 함께 어머니께 뽀뽀했다. 다음 날 아침,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현민 씨는 병원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그때 뽀뽀하고 오길 잘했다. 사랑한다고 한 번 더 말하길 잘했다.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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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쓰신 시에서 맛있다고 했던 빈대떡 두 개가 남아 있었거든요. 냉동실에요. 한 2주 전쯤에 제가 두 개 다 먹어봤어요.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인터뷰 말미에 현민 씨가 한 얘기다. 박지수 씨의 시 ‘빈대떡’ 전문은 이렇다.
올해 빈대떡이/ 가장 맛있게 만들어졌다/ 마음껏 먹고 싶은데 쉽지 않다// 구수한 빈대떡, 떡국.../ 가족들에게 먹이고 싶은데/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 같다 ( 2025. 1. 4)
빈대떡은 성체(가톨릭 의식에 쓰는 밀떡.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처럼 현민 씨의 몸과 마음에 새겨졌을 것이다. 인터뷰 후 나는 하나의 장면을 상상했다. 깜깜한 무대,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곳에 박지수 씨가 서 있다. 하얗게 빛나는 수의를 입고 특유의 환한 웃음을 띤 채. 그가 고개 돌려 뒤쪽을 향해 공을 던진다. 허공에서 유려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공. 아들 현민 씨가 손을 뻗는다. 나이스 캐치!
죽음 과정에 대해 숙고하고 대화하고 자신만의 길을 택한 것. 박지수 씨가 비극적인 가족 병력을 뚫고 해낸 일이다. 그의 가족이 헤쳐온 시간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죽음이라는 마침표는 없다고. 괜찮은 삶과 기억, 애도를 통한 연대(連帶)만 존재한다고.
※ 고(故) 박지수 님을 추모하며, 인터뷰에 참여해 주신 임현민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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