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소식
아버지가 비운 몸, 병원이 채운 콧줄
"놀라지 마라. 아버지는 괜찮으니 너무 슬퍼하지 마라." 암 진단 소식을 알리며 유영열 씨가 딸 지숙 씨에게 한 말이다. 아버지는 의사에게 ‘정확한 병명과 남은 시간을 알려달라’며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2010년 일찌감치 시신 기증을 서약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타인을 위한 삶을 고민했다. 담관암 진단 후 1년여 투병 끝인 2022년 가을, 그는 영면에 들었다.

따뜻했던 아버지
유지숙 씨는 2남 2녀 중 첫째 딸이다. 그의 기억 속 아버지는 1938년생, 8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나 시골에서 자랐다. 도시로 상경해 사업의 쓴맛을 보기도 하셨지만, 아버지는 무너지지 않았다. 거친 육체노동을 마다하지 않으며 가족을 지탱했고, 마지막 직업은 목수였다. 아버지는 지독할 만큼 성실한 수행자이기도 했다. 매일 새벽 4시가 되기도 전에 몸을 일으켜 새벽 기도를 다녀오셨고, 돌아와서는 잠든 자녀들 머리맡에 앉아 조심스레 손을 맞잡았다. 간절했던 아버지의 기도는 자녀들에게 세상을 버틸 든든한 뿌리가 되어주었다. 그는 팔순이 넘은 고령에도 여전히 현역이었다. 망치와 모루가 든 무거운 짐을 들고 일터로 나설 때면 주변 사람들이 경이로운 눈길을 보내곤 했다. ‘이제 힘든 일은 그만두시라’는 자녀들의 만류에도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아직 나한테 기술이 있고 일할 기운도 있는데 집에서 뭐 하겠니. 한 푼이라도 벌어야지." 그렇게 번 돈은 자녀와 손주들의 용돈이 되었다. 며느리와 사위들도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며느리들이 시아버지를 껴안으며 "아빠, 사랑해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지숙 씨의 기억 속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 애쓰시던, 더없이 다정한 스승이었다.
암 진단과 투병
2021년 가을, 아버지는 가려움증과 황달로 찾은 병원에서 담관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암세포 크기를 줄이면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셨다. "이만치 산 것도 감사한 나이지요. 수술은 안 하겠습니다." 모든 치료를 마다하는 아버지를 설득해 결국 서너 차례의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딸 지숙 씨는 매번 그 곁을 지켰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고통을 호소하지 않으셨다. 그저 눈을 질끈 감거나, 귀가 후 조용히 자리에 누우실 뿐이었다. 식욕이 없다거나 몸이 힘들다는 말조차 아끼셨기에 가족도 그 고통을 다 알지 못했다. 반복되는 고열과 응급실행 끝에 지숙 씨가 의사에게 물었다. 만약 치료를 중단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의사는 담관암을 방치할 경우 황달과 간 염증으로 인해 일상생활이 불가능하며, 입원이 불가피하다고 답했다. 고통스러운 항암 끝에 다행히 암의 크기는 줄어들었고,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코로나, 파킨슨병
호전되었던 아버지에게 결정적인 쇠락이 찾아왔다. 항암치료를 마치고 퇴원한 직후, 예상치 못한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으신 것이다. 원래 다니던 병원에는 잔여 병상이 없어 인근 병원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분명 제 발로 정정하게 걸어 들어가셨는데, 2주일 만에 퇴원한 아버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거동은 눈에 띄게 불편해졌고, 생기 있던 눈빛은 흐려졌으며, 인지장애가 시작된 듯 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셨다. 그 슬픔 어린 표정을 마주해야 했던 가족의 가슴은 타들어 갔다. 결국 주치의가 내린 진단은 파킨슨병이었다. 의료진은 더 이상 항암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선고를 내렸다. 입원 기간 중 발생한 흡인성 폐렴이 결정적이었다. 파킨슨병 특유의 삼킴 장애로 인해 음식물이 기도로 잘못 유입된 탓이었다. 뒤따라온 패혈증과 영양실조, 이를 막기 위해 투여된 강력한 항생제는 아버지의 남은 체력을 앗아갔다.
호스피스 대신 요양병원에서
퇴원 후 비상 상황에 대비하려면 요양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권고를 받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셨던 아버지의 간절함을 뒤로한 채, 결국 가까운 요양병원을 택했다. 감염 관리와 격리 수칙 탓에 호스피스 병동 입원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세심한 간병과 평온한 임종을 기대했던 가족의 희망은 그 문턱에서 무너졌다. 입원하자마자 콧줄(비위관) 삽입을 통보받았다.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거나 영양실조가 올 수 있어 어쩔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아버지는 고통에 저항하며 자꾸 콧줄을 빼냈고, 병원은 아버지의 손을 묶어놓았다. 콧줄이 환자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 가족은 미처 알지 못했다. 면회 때마다 마주한 것은 환자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현실이었다. "아빠, 조금만 더 힘내면 집에 갈 수 있어요." 가족이 건넬 수 있는 말은 힘없는 위로가 전부였다. 마지막 면회 날, 아버지는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맛있는 게 먹고 싶구나. 인절미 하나만 살짝 사 와서 내 입에 넣어주면 안 되겠니?" 차마 들어드릴 수 없는 간청이었다. 고심 끝에 평소 좋아하시던 과자를 사 들고 간병인에게 요청했다. "이 과자를 아버지 혀끝에 한 번만 대주시면 안 될까요?" 돌아온 대답은 냉정했다. "침도 목에 걸릴 수 있는데 절대 안 됩니다." 지숙 씨는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온다. 요양병원에 발을 들인 지 석 달이 채 되지 않아,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임종현장의 아쉬움
시신 기증 서약을 한 병원으로 옮긴 뒤, 아버지는 평소 소신대로 어떤 인위적인 생명 연장도 하지 않은 채 마지막을 준비하셨다. 진통제에 의지해 잠에 빠져 계시던 어느 날, 아버지는 잠꼬대처럼 말씀하셨다. “나는 4시 20분에 갈 거다.” 며칠 뒤, 거짓말처럼 아버지는 오후 4시 20분경 숨을 거두셨다. 의식이 흐릿한 가운데도 당신이 떠날 시간을 예고하신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임종 뒤편에는 가슴 치는 아쉬움이 남았다.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을 때마다 허락된 면회 인원은 한두 명. 가족은 번갈아 들어가며 짧은 인사를 건네는 것이 전부였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노래를 불러 드리지도,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온기를 전하지도 못한 채 동생 혼자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했다. 함께 마지막 길을 배웅하지 못한 그 날은 깊은 슬픔으로 남았다.

시신기증의 명암
빈소를 꾸리던 가족에게 연락이 왔다. 고인을 모셔가기 전에 한번 보라는 전언이었다. 마지막 인사 장소는 유가족과 관계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공동 공간이었다. 이동식 침대 위 아버지의 얼굴을 지숙 씨가 어루만졌다. 손끝에 닿은 온기는 예상보다 따스했다. "우리 아버지, 왜 아직 따뜻하죠? 정말 돌아가신 게 맞나요?" 당혹 섞인 질문에 돌아온 것은 무표정한 대답이었다. "가야 합니다." 단호한 말 한마디와 함께 아버지는 대학교 운구차로 실려 갔다.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던 가족에게 허락된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고인의 결정을 존중해 어렵게 동의한 시신기증이었으나, 현실은 냉정했다. 입관도, 발인도, 눈물 흘릴 충분한 시간도 허락되지 않은 채 아버지는 떠나셨다. ‘어차피 썩어 없어질 육신, 젊은이들의 공부에 보탬이 된다면 아까울 것 없다’고 하신 아버지의 유언이 지숙 씨의 마음에 맴돌았다. 제대로 인사 나눌 개별 공간조차 없었다는 데 대한 아쉬움은 너무도 컸다.
기증된 시신이 한 줌의 유골로 돌아오기까지는 통상 6개월 넘는 시간이 걸린다. 지숙 씨는 그동안 해부실 밖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갔다. 진척 상황을 묻는 질문에 돌아온 답은 무심했다. "모릅니다. 때 되면 연락할 테니 기다리세요." 지숙 씨가 바란 것은 완벽한 답변이 아니었다. 가족 잃은 슬픔과 기다림을 보듬어주는 인간적인 응답이었다. 약 9개월 후 시신을 맞이하는 순간도 상처가 됐다. 대학 홍보물에는 정중한 복장을 갖춘 의료진이 고인 앞에 고개 숙이며 최고의 예우를 다하는 모습이 강조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 화장터에 나타난 이는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홀로 분주히 뛰어다니는 학생 한 명뿐이었다. 운구부터 복잡한 서류 절차까지 학생 혼자 감당해야 하는 열악한 현장에서 예우는 사치였다. 눈 맞춤도, 위로의 말도 없이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에 유가족은 배신감을 느꼈다. 지숙 씨는 말한다. "학생의 고충도 알겠지만, 고인과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나요?" 만일 두 사람이 함께 와서 한 명은 실무를 보고, 다른 한 사람은 가족의 슬픔을 다독이는 성의를 보였다면 어땠을까. 지숙 씨는 결국 '태도'가 전부였다고 회상한다. 기증의 가치는 화려한 홍보 문구가 아니라, 유가족의 마음을 헤아리는 작은 배려에서 완성된다. 지숙 씨의 호소에 대해 의료계와 교육 기관은 답해야 한다. 사후관리 매뉴얼과 유가족 돌봄 시스템을 갖추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지숙 씨는 '콧줄'이라는 선택에 대해 마음이 무겁다. "정말 꼭 필요한 의료 행위였는지,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누구도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았어요." 평소 인내심이 강했던 아버지는 콧줄의 고통에 얼굴을 찡그렸고, 스스로 줄을 뽑아 결국 손이 묶여야 했다. "조금 더 알아보고 아버지의 뜻을 여쭙는 게 먼저였어요. 아버지가 싫어하셨다면 '삶의 질'을 우선으로 고려했어야 했죠. 가족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좋아하시던 음식도 맛보며 평온하게 눈을 감으셨다면 어땠을까요." 지숙 씨는 기계적으로 연장된 삶이 결코 아버지가 원한 모습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의사는 ‘영양실조에 걸리니 콧줄을 해야 한다’라고 선언했을 뿐, 환자와 가족에게 충분한 선택의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지숙 씨는 호스피스 병동을 이용하지 못한 점이 회한으로 남는다고 했다. "병원 임종은 아버지가 바라던 끝이 아니었을 거예요. 호스피스에서 소통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미리 고민해야
지숙 씨는 생애 말이 아닌 평소에 충분한 고민을 거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주변 반응은 대개 미온적이다. ‘혹시 모르잖아, 다시 살아날지도.’ 혹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후회가 남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지숙 씨 또한 아버지를 연명의료 없이 보내드렸음에도, 막상 가족 일이 되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음을 인정한다. "내 아이나 남편의 생사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해봐야 하지 않을까 고민할 것 같아요. 확고한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죠." 당사자의 주관이 뚜렷하지 않으면, 결국 의료진의 권유에 이끌려 원치 않는 연명의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고(故) 유영열 씨의 유해는 화장 후 선산에 모셔졌다.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니 봉분은 만들지 말라’던 유언을 따랐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내어주고 비우신 뒤 땅으로 돌아가셨다.
호스피스 임종철학
유지숙 씨가 꿈꿨던 호스피스 임종은 어떤 모습일까. 팬데믹 시기에 치러진 가혹한 투병과 이별을 되짚으며, 당시 호스피스 현장이 마주했을 고뇌를 가늠해 본다. 답을 찾기 위해 『그래도 마지막까지 삶을 산다는 것- 간호사들이 말하는 코로나 시대의 호스피스 병동』을 펼쳤다. 이 책은 코로나 시기, 호스피스 병동의 풍경을 기록한 인터뷰집이다. 저자인 권신영 교수는 약 20년간 현장을 지킨 호스피스 전문 간호사 출신으로, 현재는 강동대학교 간호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그는 감염병이 초래한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도 '간호의 본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여 책에 담아냈다. 먼저 권 교수에게 비위관 영양(콧줄)에 대한 호스피스의 철학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호스피스의 최우선 원칙은 '편안함'입니다. 콧줄 삽입은 본질적으로 침습적인 행위예요. 만약 이것이 환자에게 고통을 준다면 억지로 유지하지 않습니다. 물론 장폐색으로 인한 구토나 복부 팽만감 같은 증상을 완화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시행하기도 하죠. 그러나 단순한 영양 공급만을 위해 환자의 불편을 감수하는 것은, 호스피스의 본래 방향이 아니에요." 그는 덧붙여 말기암 환자의 예후는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기에, 영양 공급 여부에 매몰되기보다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호스피스 병동에는 '임종실'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모든 면회가 제한적이었던 팬데믹 시기와 달리, 이제는 가족과 지인들이 모여 마지막 인사를 나눌 수 있다. 시신 기증자의 경우, 병원은 예우를 갖춰 임종을 돕고 대학병원에 연락해 고인을 모신다. 최근에는 일반 병동에서도 임종 간호 교육이 이뤄지고 있으며, '자문형 호스피스' 제도가 확산됨에 따라 임종기에 접어든 환자에 대한 예우도 성숙해졌다. 권 교수는 감염병의 파고 속에서 떠나야 했던 유영열 씨 사례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당시는 가족조차 병원에 상주할 수 없던 시기였습니다. 시신 기증으로 인해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떠나보내셨으니 허망하기 짝이 없으셨을 것 같아요. 사망 후 아무 대가 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셨는데, 지금이라면 그렇게 임종 전후 존엄성이 훼손되는 일은 없었겠죠. 고인의 유가족이 굉장히 슬프고 낙담하셨겠어요.”

존엄한 임종을 위해
권 교수의 저서 마지막 장에는 가정 임종을 맞이한 한 할머니의 사연이 담겨있다. 박새 소리가 들려오고, 창호지 사이로 스며드는 볕이 아늑한 온돌방. 그곳에서 보낸 할머니의 마지막 시간은 우리가 염원하는 품격 있는 간호와 평온한 임종의 전형을 보여준다. 권 교수는 저서에서 ‘아기를 돌보는 엄마는 그 아이의 생사를 두고 안달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을 인용하며, 죽음 또한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역설한다. 죽음은 ‘언제, 어떻게 닥칠지’ 전전긍긍해야 할 종착지가 아니다. 떠나는 순간까지 환자가 오롯이 살아있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호스피스 돌봄의 본질은, 두려워하는 환자의 손을 잡고 터널 끝까지 함께 걷는 데 있다. 죽음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 비로소 진정한 평온에 닿는다는 믿음, 빛에 대한 소망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임종기의 숭고한 통과의례다. 그는 말한다. 죽음은 마침표가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라고.
호스피스 병동 밖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이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우리 사회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권신영 교수는 무엇보다 '사회 전반의 인식 개선'을 우선 과제로 꼽았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죽음을 실질적으로 대면하지 못하고 있어요. 많은 이들이 죽음을 타인의 일로 치부하곤 하죠. 말기 돌봄과 임종을 내 삶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인식 전환이 절실합니다." 구체적 대안으로 그는 '의료 서비스의 유기적 연결'을 강조했다. 재택의료센터 등의 돌봄을 받다 임종이 예견되는 생애 말기 상황이라면, 가정 호스피스와 연계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정 내에서도 말기 증상을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전문가 간의 긴밀한 협력이 필수적이다. 특히 2026년 3월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된 '통합돌봄지원법'에 대한 홍보와 교육의 중요성도 역설했다. 이 법안은 병원이나 시설이 아닌, '살던 곳'에서 존엄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의료·요양·돌봄 서비스를 통합 제공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권 교수는 돌봄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분절된 서비스를 하나로 묶는 연계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제언한 사회적 대안의 끝에는 깊은 울림을 주는 철학이 맞닿아 있다. "생의 마지막 돌봄이 이뤄지는 장소는 단순히 죽음을 기다리는 공간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내는 삶의 현장입니다."
가장 취약했던 팬데믹 시기, 의료 현장의 실상에 대한 기록은 존엄한 임종 철학을 세우는 일이다. 권신영 교수의 저술과 유지숙 씨의 증언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의 단단한 토대가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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